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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영복과 김광석, 윤도현의 뒤에 있던 사람
  
 작성자 : 허여사
작성일 : 2019-08-06     조회 : 41  

[기고]멍석 잘 깔았던, 탁월한 문화기획자 이영윤을 보내며

살다보면 아 이럴 때 이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간절해지는 순간이 있다. 의미있는 일을 하려는데 주변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마디의 조언이 필요할 때, 아니면 그냥 다 내려놓고 술 한 잔하고 싶을 때, 어김없이 소주병 앞에 놓고 늘 그 자리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던 사람. 이영윤 선생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술값, 밥값 걱정없이 술 마시고 밥을 먹었다. 때론 심각한 일을 의논하고 때론 어려운 부탁도 했다. 하지만 상당수는 그냥 공짜술과 공짜밥을 먹으면서 잠시 쉬어갔다. 사자처럼 풀어헤친 머리에 술 취한 듯 허허 웃으면서 상대방을 보고 있지만 눈은 반짝이고 판단이 빠르다. 지향점은 분명하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것을 피하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거나 그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게 돕는 일로 일관한 사람, 이영윤 선생은 한 마디로 멍석까는 사람이었다.   

\본격적인 멍석은 1981년 1월 문을 연 정동 마당세실극장에 깔았다. 그의 멍석에 머물다 간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1985년부터 굿학회의 원로민속학자 임석재 회장, 김인회 교수, 사진작가 김수남과 함께 ‘영상으로 보는 한국의 굿과 무당’과 ‘민요감상회’를 매달 한 번씩 3년 동안 했다. 그 모임에는 나도 끼어있는지라 소상히 아는 편이다. 

당시는 미신과 동일시되던 굿현장의 영상을 대중에게 보여주면서 전공학자들이 문화적 의미를 설명했다. 임석재 교수는 평생 모은 전국의 민요를 들려주었는데 그 모임 출신의 민속학자, 작가, 전통문화기획자들이 적지 않으니 썩 포실한 멍석이었다. 마음속 깊은 친구였던 고 신영복 선생도 잠시 멍석에 앉았다. 선생이 출감한 1988년 연말 마당세실극장 옆 세실레스토랑에서는 난데없는 서예전이 열렸다. 22년 20일 만에 맨주먹으로 세상에 나온 친구의 전세금이라도 보탠다면서 벌인 전시회는 신영복 선생의 초대서예전이었지만 일면식도 없던 유홍준 교수가 평을 쓰는 등 서예가로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아마도 당시 이영윤 선생에게는 33개 작품으로 천만 원 모아 친구에게 전달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을 것이다. 1993년에는 신영복 선생의 230여 장 옥중서한을 영인하여 필체가 고스란히 담긴 <엽서>를 출간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빠진 내용을 보완한 책으로 내용은 상당부분 같지만 작은 엽서 한 장마다 정갈하게 채워진 신영복 선생의 감성은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1989년 정월 대보름에는 ‘다시 님을 맞으며’라는 제목으로 사흘동안 황해도굿 인간문화재 김금화 만신의 굿판을 벌였다. 김금화 만신은 첫날 대감놀이로 신명을 돋우고 둘쨋날은 칼에 올라가는 작두놀이로 경계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의 아픔을 대신했다. 마지막 날에는 길을 갈랐다. 수백 명이 촛불을 든 가운데 무녀는 무명 한 필을 가슴으로 찢어 갈라나가면서 긴 세월 씨줄 날줄로 엉킨 민족의 한을 풀어주었다. 김금화 만신은 사흘동안 굿하여 번 돈을 모조리 수녀회에 기부하였다. 우리 사회의 천민사제 무당이 평생 불치환자들을 돌보면서 속세를 등지고 살아가는 수녀에게 기금을 전달하는 모습은 우리 민족은 물론이고 지구의 평화와 공존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상징적 행위로 기억되었는데 그 또한 이영윤 선생이 편 멍석이었다. 
 

▲생전의 이영윤 선생. <경향신문> 자료 사진


마당세실극장에서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것은 마당놀이일 것이다. 무대로 간 마당극 <토선생전>으로 문을 연 마당세실극장에서는 이름에 걸맞는 다양한 마당놀이를 펼쳤다. <장터>를 공연할 때는 실제로 극장입구에 난장을 트고 물건을 팔았다. 심청전의 외전이라고 할 수 있는 <뺑파전>은 높은 인기로 수개월 동안 앵콜을 이어갔는데 판소리를 기반으로 한 공연 가운데 가장 대중화에 성공한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대마초 후유증으로 근신 중이던 김덕수의 <사물놀이>가 한 달 동안 공연하면서 전열을 가다듬은 장소도 마당세실극장이다. 강릉단오굿의 악사들로 구성된 무속타악단 <푸너리>도 마당세실극장에서 첫 서울나들이를 했고 제주도심방들이 상경하여 아이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불도맞이> 굿을 공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영윤 선생이 가장 공을 들인 작품은 1983년 초연한 창작뮤지컬 <님의 침묵>이었다. 워낙 한용운 선생을 좋아했기에 존경하는 선조를 제사 지낸다는 마음으로 올린 공연이었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제작비를 감수하면서 한국적 뮤지컬을 만들었다. 김상열 작, 연출에 유승엽이 음악을 담당하고 김갑수와 이혜영이 출연한 <님의 침묵>은 뛰어난 예술성으로 찬사를 받았고 인기도 얻었다. 그렇지만 3백석 소극장에서는 매회 매진이 되어도 30여 명 출연진과 스태프의 밥값이 모자랐고 그 어려움은 역시 멍석을 깐 이영윤 선생의 몫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영윤 선생은 파격적으로 낮춘 입장료와 심심치 않게 벌인 무료공연으로 누구나 공연을 볼 수 있게 극장 문을 열어두었다. 그 가운데 인기를 끈 것이 바로 콘서트이다. 당대 최고 가수였던 김광석, 산울림과 떠오르는 신인 윤도현밴드, 김장훈의 노래를 두 시간동안 마음껏 들을 수 있었던 소극장공연이 바로 마당세실극장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설날 하루를 제외하고 일 년 내내 문을 열었던 마당세실극장에서 이영윤 선생이 편 멍석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인생의 소중한 경험을 나누었다.  
 
 누구의 인생이나 드라마가 될 수 있고 파란만장이라는 단어를 부칠 수 있겠지만 이영윤 선생도 모진 세상을 살았다. 공군 복무시절 통혁당 사건으로 6개월 수감생활을 한 뒤 정상적인 취업은 어려웠다. 남이 안 하는 일, 못 하는 일을 잘 해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의 특기였다. 타고난 기획자로서 아이디어만 좋은 것이 아니라 추진력도 뛰어났다. 언뜻 보면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완벽주의자인지라 꼼꼼하고 빈틈없이 일하는 사람이다. 참신한 기획으로 시라노백화점, 코리아나백화점, 서린호텔, 새로나백화점 등을 창업하거나 새로 일으켜 세워 경영의 귀재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영윤 선생은 단지 일만 잘한 사람이 아니다. 그가 한 일에는 어딘가 일상을 뒤트는 유모어가 있다. 대한민국 땅값 일번지 명동 한복판에서 최저가 물건을 파는 시라노백화점은 그 자체가 역설이다. 희곡 ‘시라노 드 벨쥬락’에서 이름을 따온 시라노백화점에서는 ‘전국 큰코대회’를 열기도 했는데 당시 심사위원은 만화가 고바우 김성환 화백이 맡았다. 코리아나백화점의 광고도 흥미로웠다. 정보가 생명인 광고지는 전면이 하얗게 비어있다. 잘 보면 맨 밑바닥에 작은 글씨 한 줄, ‘꿈과 실리를 파는 백화점 코리아나’. 요즘 같으면 대단한 카피라이터로 성공했을 것이다. 손을 대는 것마다 성공을 이어갔지만 그는 계속 직장을 옮겼다. 만들어 성공하면 떠나고 만들어 성공하면 또 떠나 ‘오프너’라는 별명까지 들었다. 왜 한 군데 머물지 않았을까?  

두 가지 정도의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하나는 평범한 일상을 참기 어려워하는 성격이다. 그는 야전사령관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다. 목숨이 오갈 정도의 절박할 상황일수록, 뚜렷한 승부가 보이는 현장일수록 그의 냉정한 판단과 섬세한 진행이 빛을 발했고 번번이 승리했다. 그렇지만 오히려 일상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상의 안위를 지키려는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그는 백전백패였다. 두 번째는 그동안 해온 일이 자신의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정 좋아하는 일이 아니었기에 끝없이 옮겼으리라는 가설인데 이건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드디어 이영윤 선생이 떠돌이 생활을 접고 안착을 했기 때문이다. 바로 극장이었다. 

난데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릴 때부터 연극과 영화를 사랑한 이영윤 선생의 마음 깊은 곳 열정은 늘 극장을 향해 있었다. 이미 1962년 대학생 시절에 <원귀 마당쇠>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마당극을 만든 적이 있었다. 판소리를 마당극처럼 만든 <놀부뎐>을 기획하였고 코리아나백화점에 무료공연장을 열기도 하였다. 30여 년 동안 인기를 끌었던 문화방송의 마당놀이 역시 제1회 공연 <허생전>의 기획자는 바로 이영윤 선생이었다.

1979년 이영윤 선생은 마당기획실을 열고 본격적으로 공연계에 뛰어들었다. 마당기획실의 첫 작품은 1980년 5월 22일 서울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한 <토선생전>이다. 워낙 살얼음판 같은 시절이었고 남쪽에서는 뭔지 알 수 없는 수상쩍은 일들이 벌어지는 와중에 올라간 <토선생전>은 신랄한 풍자극이었다. 이영윤 선생은 공연하는 열흘 내내 단 일 분도 의자에 앉지 못했다. 떠도는 소문은 흉흉했고 언제 공연이 중단될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무대 위에서는 광대들이 춤과 웃음으로 무능한 용왕을 풍자하고 있었지만 무대 뒤에서는 매시간 심장을 졸였던 공연이었다. 
 
대학에서 탈춤반 창작극 지도를 했던 나는 당시 3명의 연출 중 한 명이었다. 배우들에게 탈춤을 가르치고 판소리 아니리조 대사 훈련을 시키는 등 자잘한 일을 맡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참가한 공은 있었다. 마지막 공연이 무사히 끝나던 날 이영윤 선생은 내 소원을 물었다. 나는 전승이 중단된 경기도당굿을 재현하고 싶다고 말했고 며칠 후 2백만 원을 지원받아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경기도당굿은 인천이나 수원등지에서 세습무들이 주관하는 마을굿이다. 새마을운동으로 마을굿이 중단된지 20년이 지나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다행히 연로한 무당들이 살아있었기에 하룻밤을 새우면서 도당굿을 재현했고 덕분에 경기도당굿은 전승의 맥을 이어 국가무형문화재가 되었다. 이 역시 이영윤 선생의 음덕이 아닐 수 없겠다. 그후 15년 동안 이영윤 선생은 치열하게 마당세실극장에서 새로운 멍석을 깔고 또 깔았다.
 
그가 평생 좋아한 것은 마당이고 평생 추구한 것도 마당정신이었다. 이영윤 선생은 어디에나 마당을 붙였다. 마당기획실로 시작하여 마당세실극장, 매일 소주를 마시던 극장 옆 한식당 이름도 마당, <엽서>를 낸 출판사는 너른마당이었다. 마당은 주인이 없다. 이웃이건 지나가는 손님이건 누구나 들어와 쉬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공동체의 공간이 바로 마당이다. 마당에는 연단도 턱도 없으니 상하가 존재할 리가 없다. 평등한 가운데 누구나 공연을 즐기고 참여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고 그건 더 나아가 그런 세상을 바라는 그의 이상이기도 했다. 이영윤 선생이 그 꿈을 이루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마당세실극장에서 그가 편 멍석자리만큼 우리 사회가 조금씩 그 꿈을 실현했노라 말할 수는 있겠다. 
 
이제 이영윤 선생의 마지막에 대해 말할 때가 왔다.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에 다닌 이영윤 선생은 1961년부터 덕소에서 야학을 운영했다. 학생들이 늘어나 흙벽돌로 학교를 짓는데 문을 달 돈이 없었다. 무조건 사상계 사무실로 장준하 선생을 찾아갔다고 한다. 야학당을 짓는다고 하니 선생은 국밥을 사주고 5천 원을 주었다. 그 돈으로 토담집의 문과 창을 달았고 입대할 때까지 3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다.  

1995년 8월 17일은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사고로 돌아가신 20년이 된 날이었다. 은혜를 마음 깊이 간직해온 이영윤 선생은 꼭 장준하 선생 20주기 기념행사를 해드리고 싶었다. <님의 침묵> 공연으로 한용운 선생을 제사지낸 것과 같은 그만의 방식으로 은혜를 갚고 싶었던 것이다. 점심반주 소주 두 병으로 시작하여 늦은 밤 찾아온 사람이 돌아갈 때까지 안주도 먹지 않고 술과 함께 하던 이영윤 선생이 돌연 금주를 선언했다. 술도 끊고 두 달 이상 심혈을 기울여 일을 진행했지만 장준하 선생 기념공연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원래 이영윤 선생은 마음이 맞지 않고 화가 날수록 말을 아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그렇지만 막히는 일이 그리도 많았던가 어렵게 장준하 선생 기념공연을 준비하던 이영윤 선생이 공연을 앞두고 갑자기 쓰러졌다. 쉰다섯, 아직 젊은 나이에 그는 고단했던 그의 전투를 접었다.   

뇌출혈로 쓰러진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왼팔 하나였다.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신을 놓지는 않았다. 누가 봐도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아내 임경자 여사의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감사히 여겼다. “몸이 멀쩡해도 정신을 잃으면 죽은 것과 무엇이 다른가, 불편하고 힘들겠지만 암처럼 죽는 병이 아니니 훨씬 낫지 않은가, 그동안 고단했으니 쉴 자격이 충분하다. 남달랐던 기억력이 여전하고 아름다움과 슬픔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남아있으니 남편은 살아있는 것이고 가장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24년 동안 이영윤 선생은 비록 몸은 자유롭지 못했지만 어쩌면 가장 마음 편한 제2의 인생을 살았다.
  
헌신적이고 사려깊은 아내와 아들, 딸은 한순간도 아버지를 혼자 두지 않고 돌보았다. 아들은 오로지 아버지를 위하여 서른이 넘은 나이에 한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다. 두 딸은 번갈아 재택근무를 하면서 어머니를 도와 아버지를 간호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내리사랑이라고 부모의 자식사랑은 본능이지만 자식이 효를 실천하기는 물길을 거스르는 인위적인 일이라 쉽지 않은 법이다. 어렵기 때문에 공자님도 효를 강조한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힘든 상황에 닥쳤을 때 가족의 사랑과 신뢰를 잃지 않는 것이다. 이영윤 선생은 이를 해냈고 아들과 딸은 공자님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참으로 대단한 가족이다.  
    
이영윤 선생은 차갑고 또 따뜻한 사람이었다. 일에 관해서는 더없이 냉정하고 차갑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힘이 닿는 한 기회를 주고 따뜻한 정을 베풀었다. 인간이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을 터였다. 그렇지만 사람과 함께하는 일이 아니면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 또한 그의 믿음이었다. 많이 베푼 만큼 상처도 컸던 그의 믿음에 최종적으로 가장 확실하게 응답한 사람은 바로 가족이었다. 

2019년 7월 25일, 이영윤 선생은 긴 여행을 끝냈다. 향년 79세, 이제 영원히 자유로워진 이영윤 선생의 안식을 기도한다. 

황루시/가톨릭관동대학교 명예교수/2019.7.29./프레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