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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시민을 두려워하랴
  
 작성자 : 허여사
작성일 : 2014-05-28     조회 : 2,462  

국민 담화를 발표하던 대통령의 목소리는 매서웠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다. 33일을 참다 쏟아낸 통치자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것을. 국민의 비난을 한 몸에 받은 해경은 순식간에 해체됐다. 국민 생활을 책임진 관료들은 그들의 수장에 의해 범죄조직의 대명사인 마피아로 불렸다. 대통령이 통치의 구성원들을 ‘관피아’로 발음하는 순간 대통령 자신도 그 음험한 뉘앙스에 휩싸일 위험을 무릅쓰고 말이다. 현대 한국의 지배 엘리트를 생산하던 행정고시는 중단 위기에 처했다. 대통령은 ‘국가’안전처와 부패방지법을 내세워 ‘국가’ 개조를 약속했다. 그러곤 눈물을 삼켰다. 제자들을 찾아 물속으로 스러진 선생님들의 이름을 부르며.

처음 접한 대통령의 눈물은 숙연했다. 그런데 그 숙연한 감동이 흩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게 뭘까, 이 어긋남은. 국가 개조의 우렁찬 확약이 국민의 깊은 울림을 자아내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이런 느낌은 비단 나의 까칠한 감각 탓만은 아니었다. 대통령의 절절한 담화에도 불구하고 집권 여당의 하락세가 반등하지 않는 결과가 그것을 말해 준다. 국민의 가슴은 비통하지만 판단의 칼날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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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대통령 담화에 기대했던 바는 세월호 사후 처리도 그렇거니와 이후에 닥쳐온 ‘2차 충격’을 어떻게 치유할지에 있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국가의 무능, 혹은 그나마 의지해 왔던 공공(公共)의 실체가 허망한 것이라는 자조와 허탈감을 어떤 방식으로 수리할 것인지를 예의 주시했던 거다. 국민은 어렴풋이 느꼈을 것이다. 붕괴된 공(公)개념을 재건할 주체는 공(公)의 최고 관리자인 ‘국가’가 아니라 공(公)의 발원지인 시민과 시민사회라는 것을. 그런데 대통령 담화에서 시민과 시민사회는 여전히 구경꾼이다. 공(公)개념의 재건에 다시 주역으로 나선 국가의 채널에는 유족들에 대한 철저한 보호의지와 상처받은 대중심리의 치유 문제가 잡음 섞인 주파수처럼 명료하게 잡히지 않았다.

무너진 공개념 재건에는 무엇보다 유족들에 대한 사후 관리가 제1항이어야 했다. 집단초상을 치른 단원고 인근 마을과 일반인 희생자 가정의 경제 생활은 쑥대밭이 됐거나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됐을 것이다. 거기에 악몽처럼 따라붙은 정신적 고통의 늪을 적어도 10여 년 통과해야 한다는 점이 환기돼야 했다. 경제적 회생과 정신적 치유의 공적 지원을 향후 몇 년간 약속하는 것이 ‘공(公)의 복원’을 위한 필수요건이다. 유족들이 전해 받고 싶은 것은 유병언 일가의 악덕 상행위를 징벌하고 보상금을 최대한 확보하겠다는 국가의 결기보다 국가가 그 자신들의 버팀목이 되겠다는 든든한 책무 이행서다.

그래야 국민의 다친 상처도 치유된다. 국민은 대통령이 내놓은 27가지 국가 개조 항목이 과연 적합한 대안인지 헤아리지 못할 뿐 아니라 개조의 주역이 여전히 국가라는 점을 석연찮게 생각한다. 정치가 정치를 개혁하고, 청백리가 탐관오리를 구축한다는 그 발상은 건국 후 지금까지 들어왔던 오랜 소문이자 쭉정이 벼를 추수하는 허망한 농심(農心)을 선사했다는 사실을 반복된 경험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왜 가슴이 무너진 시민에게 묻지 못하는가, 왜 국가 불신에 전전긍긍하는 시민사회에 신뢰 회복의 답변을 구하지 않는가? ‘순수 유족’이 불순한 집단과 조우할까 경찰은 망을 봐야 했을까? 분노한 시위대를 연행한다고 누그러질까? 분위기 반전을 위해 방송 협조를 은밀히 요청했는가? 혹시, 월드컵이 열리기를 고대하고 있는가?

무능국가의 뒤엉킨 어망(漁網)을 국가만이 수선할 수 있다고 믿는 정치권의 확고한 국가주의는 아무래도 낡은 발상이다. 2013년 한 해 동안 이익 투쟁과 오작동으로 허송세월한 국회가 세월호 국정감사를 만방에 의연히 선포하고 나선 저 파렴치한 망각증세도 낯설다. 국회가 청와대를 두고 국정감사에 포함할지를 갑론을박한 정도로, 시민사회는 국회를 소환해 감사할 것인지를 따져 물어야 한다. 일방적 지시로 일관해 온 통치자와 받아쓰는 각료들을 어찌할 수 없이 바라만 봤던 여당, 장외투쟁이 전공인 야당, 친북이념으로 틈새전략을 구사한 소수정당이 선거를 앞두고 국가 개조라는 돌파구에 환호하는 모습은 야합과 다름없다. ‘눈물은 늦었고 대책은 일렀다’는 야당 대표의 화려한 레토릭은 집권 여당의 여린 행보마저 저지하는 대책 없는 거부권임을 시민들은 알고 있다. 국회도 시민 감사의 대상이다. 

 

그러나 국민은 율사를 또 다른 율사로 바꾸고 장군을 또 다른 장군으로 교체할 저 도저한 국가주의에 더 막막할지 모른다. 비통했던 지난 한 달 동안 시민의식은 정치권보다 훨씬 성숙해 있음을 보여 줬지만 유효기간이 지난 국가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시대에 누가 시민을 두려워하랴. 세월호 참사의 주범은 ‘시민 없는 민주정치’였다.

송호근/서울대 교수/중앙일보/2014.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