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아고라

인문의 생각과 가치, 사유를 통한 몸과 마음의 즐거움 등을 자유롭게 교환하는 광장입니다.

 
  시민사회가 출구다
  
 작성자 : 허여사
작성일 : 2014-05-22     조회 : 2,528  

세월호 참사가 사고가 아닌 범죄라면 검푸른 슬픔의 계곡에서도 살인의 주범을 찾아야 한다. 믿음을 저버린 정부와 언론은 선장과 선원을 주범으로 몰아가고 있다. 짐승 같은 처신엔 합당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명예는커녕 최소한의 자존심도 지킬 수 없는 그들의 처지를 이용해 살인을 교사한 진짜 범죄자가 있다. ①승선원의 생명이 아니라 선령 연장을 위해 관료를 매수해온 해운조합업체들, ②기업 성장이 국민행복이라며 해운법까지 고쳐 운행기한을 30년으로 늘린 정부, ③기업과 정부의 더러운 유착하에서 안전관리 명목으로 사리사욕을 챙겨온 운항관리감독자들, ④이들의 공모와 치죄를 모르쇠하며 실종자 구조보다 무능한 정권 구조에 집중한 해양경찰청과 검경합동수사본부 곳곳에 공범자들의 악취가 풍긴다. 

 

설령 공모살인자들의 범죄사실이 낱낱이 밝혀지고 시민 장례로 어린 생명들과 고별할 날이 온다 해도 한달 넘게 팽목항에 정박한 우리의 죄의식이 사그라져선 안 된다. 눈물의 바다로 심장이 떠내려가는 고통을 견뎌야 할 유족들 앞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수치심을 새겨야 한다. 분노와 비탄의 강물을 지나 냉소와 우울의 바다로 흘러가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묻는다. 눈앞에서 침몰하는 배를 보고도, 그 속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보고도, 생명을 잃고 몸까지 훼손되는 아이들을 보고도 왜 우리는 이토록 무기력한가? 인류를 구원할 신처럼 권력을 독점해온 과학기술과 자본시장, 그리고 국민국가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가? 



관리감독에 능숙한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
이토록 무기력한 이유는
무엇인가?
‘대박’ 운운하며
통일조차 경영논리로 환산하는
도박 정치에 빠진
대통령만의 문제일까? 

  


 
대통령을 심판하기에 앞서
시민들 스스로
하나의 시민단체라도
후원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자본시장은 과학기술의 배후에서 그것의 환상을 조작해낸다. 과학기술 신봉자들은 대개 시장을 무한 신뢰한다. 오귀스트 콩트 같은 과학주의자는 실제로 순수한 물신숭배자였다. 요즘 같으면 돈을 신처럼 모신 것이다. 이들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애덤 스미스는 한 나라의 경제적 부가 시장의 자유에 달렸다고 외친다. 이익을 키워 처지를 개선하려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시장에서 자유롭게 부딪치도록 보장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분업이 촉진되고 교환이 늘어나면서 생산성이 높아지고 자본이 축적된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종북 낙인을 피하려면 저런 고전적 시장주의조차 비판해선 안 된다. 그렇다고 이기심을 공공성으로 둔갑시키는 마법의 손을 믿는 것은 마술의 종교화다. 손이 신이 된다. 

 

스미스는 정의와 도덕조차 보이지 않는 신에 의해 조화롭게 된다는, 일명 ‘예정조화론’을 내세운다. 그에 따르면 불평등을 줄여야 할 분배의 정의는 나눔의 방식이 아니라 나눌 수 있는 빵의 크기에 달려 있다. 빵이 커지면 저절로 정의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맹자만큼이나 인간에 대한 신뢰가 컸던 스미스는 반사회적 이기심도 결국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연적 공감능력에 의해 조화를 이룬다고 말한다. 이런 형태의 ‘예정조화론’은 스미스만이 아니라 미래를 낙관했던 서양 근대의 거의 모든 사상가들이 공유하는 이데올로기다. 자본과 시장의 힘을 지나치게 신뢰한 나머지 신처럼 떠받든 것이다. 그런데 ‘예정조화론’은 예나 지금이나 강자에겐 축복이지만 약자에겐 저주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 안에서만 행세를 한다면 그 나름 미덕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신이 된 손은 시장 바깥의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니며 욕망을 조작하고 삶을 농락한다. 10대 경제대국이라는 꿈을 성취했건만 자본시장은 여전히 국민의 생명조차 파렴치한 이기심에 내준다. 그렇게 진도 앞바다에 계류된 자본은 잔인한 만큼 무기력하다. 이토록 무능한데도 신에 버금가는 권력을 향유해왔다면 그에 따른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신에게, 더구나 보이지 않는 신에게 책임을 묻기란 불가능하다. 국민이 국가를 부르는 연유다. 

 

국민국가는 공익의 기반 위에서 사익을 보장하는 권력체계다. 그래서 국민은 국가에 의한 통제와 규율을 감내한다. 우리는 실제로 대한민국의 국민 통제력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 온몸으로 체감하며 살고 있다. 그렇게 관리감독에 능숙한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 이토록 무기력한 이유는 무엇인가? ‘대박’ 운운하며 통일조차 경영논리로 환산하는 도박 정치에 빠진 대통령만의 문제일까? 

 

국가 경영자를 자처하며 기업 경영자들의 보스가 된 대통령이 관리하는 국가는 공적이기보다 사적이다. 이런 국가는 국민이 아닌 국가의 힘과 부의 축적에만 관심을 쏟는다. 이렇게 공적 정의(義)가 아니라 사적 이익(利)만 좇는 국가는 국민의 안전과 안녕 앞에서 무기력하다. 비상시국을 연출하며 국민을 억압해온 독재가 끝났다고 축배를 마신 지 오래지만 무기력한 나라의 국민은 항구적 비상상황에 빠진다. 경제성장을 빌미로 시장과 도착적으로 유착한 국가에서 사회적 약자의 일상은 평상(平常)이 아니라 비상(非常)이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계속해서 과학과 시장, 그리고 국가의 무기력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다. 세 가지 권력체계의 은밀한 야합이 세월호 참사의 진범이라는 것을 끝까지 밝혀야 하는 이유다. 언젠가 이것들의 통정이 끝날 것이라고 기대해선 안 된다. 더구나 언론인, 법조인, 정치인, 그리고 뜻있는 개인들이 이것들의 내통과 담합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은 지나친 낭만이다. 이것들의 추악한 짬짜미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두터운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것뿐이다. 

 

시민사회가 빈약한 나라에서 국민 개개인은 세 가지 권력체계와 맞짱을 떠야 한다. 하지만 이들 권력체계는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개인의 급진적 주장조차 그 체계를 공고히 하는 자양분으로 이용할 만큼 막강하다. 그러니 국가 구성원인 국민 개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인 시민으로서 서로 연대하며 단체를 결성하고 후원해야 한다. 시민단체의 수가 늘고 회비를 내는 회원의 수가 많아져야만 권력체계에 의해 식민화된 시민의 삶과 생명을 되찾을 수 있다. 여객선 224척, 화물선 793척, 유조선 734척이 있다지만 지금 이 나라엔 선주와 해수부 관료의 유착을 감시할 단 하나의 시민단체도 없다. 

 

 

대통령을 심판하기에 앞서 시민들 스스로 하나의 시민단체라도 후원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과학기술, 자본시장, 국가행정을 단속하면서 보건의료, 교육연구, 문화예술, 언론출판 등의 공공성을 견인할 시민단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우리의 미래는 번지르르한 비참과 가련한 안락에서 허둥댈 것이다. 사회가 강해야 나라가 건강하다. 먹이를 물고 눈물 흘리는 악어를 믿어선 안 된다. 악어의 눈물은 먹이를 삼키기 좋게 수분을 내보내기 위함이지 먹잇감을 위로하려는 것이 아니다. 위로 대신 함께 저항하는 시민이 진짜 강국을 만든다.


“아빠! 배가 기울고 컨테이너가 떠다녀!” 급박한 상황에서 딸의 목소리를 들은 한 아버지가 “당장 친구들과 갑판으로 올라가!”라고 외쳤다. 아버지의 외마디에 전화를 건 딸과 그 친구들은 배를 탈출했다. 국민을 향해 대통령이 호소한다. “대한민국을 완전히 다른 나라로 태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새 국가를 만들 테니 믿고 기다려 달라는 이 나라 선장의 말이 무섭다고 뛰어내릴 심사가 아니라면 사회, 곧 시민사회를 형성하고 참여하는 길이 유일한 비상구다. 

 

박구용/ 전남대 교수/한겨레/2014.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