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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는 것처럼 있는 중심
  
 작성자 : 허여사
작성일 : 2019-02-25     조회 : 129  

내 수업에 오는 학생 중 김아무개라는 친구가 있다. 용모 단정하고 공부도 잘해 여러 모로 눈에 띈다. 이후 알았지만 과대표라고 한다. 요즘 이 학생을 보면 예전에 읽은 ‘완장’이라는 글이 생각난다. 완장을 찬 후 완전히 딴 사람이 되는, 그런 정도는 아니지만 아무튼 이 학생의 행동에는 늘 완장 찬 사람 특유의 우쭐함이 보인다. 자기중심적이고 심지어는 친구 동료의 의견까지 무시하기 일쑤다. 수업 중에도 동료에 비해 칭찬이 덜하다 싶으면 불쾌한 기색이 역력해진다.

 

비단 그 학생뿐만이 아니다. 누구나 대표가 되고 중심이 되면 십중팔구는 그렇게 되기 쉽다. 내가 그랬고 네가 그랬으며 그들이 그랬다. 분명 ‘완장’에는 사람을 순식간에 우쭐하게 만드는 독성이 들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팔에 완장을 두르면 으스대기 마련인 것 같다. 완장의 독성이 사람의 에고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독성이 온몸에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며, ‘완장’의 임종술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크든 작든 어떤 집단의 대표라는 자리는 매우 위험한 자리임에 분명하다. 심지어 치명적일 수도 있다. 왜 대표라는 자리가 치명적일까. 대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중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표가 겉으로 드러나는 중심으로 오해될 때 생긴다. 겉으로 드러나면 중심이 아니다. 알다시피 좌표평면에 중심을 나타낼 때, 그것은 제로포인트(0)로 표현된다. x축의 값이 0인 동시에 y축의 값도 0인 곳이 바로 중심이다. 좌표평면에 어떤 값을 지니는 한, 다시 말해 좌표평면 어디에 그 위치가 드러나는 한, 그 자리는 중심이 아니다. 이렇듯 중심이란 사방팔방 어느 방향으로 따져도 0인 자리이다. 말하자면 0은 없는 것처럼 있는 중심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란 바로 이런 자리다. 자기를 나타내는 어떤 값도 지니지 않지만, 그럼에도 참으로 있는 자리가 바로 무아의 자리이다. x축 또는 y축의 어떤 방향으로 고개를 내미는 거짓 자아를 죽여 끊임없이 중심(0)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곧 수행이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수행과 통하여 스스로의 좌표를 제로포인트로 옮겨가는 무화(無化)의 종교다.

 

그러면 기독교는 어떤가. 기독교의 십자가는 x축과 y축이 만나는 자리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짊어진 자리는 x축과 y축이 교차하는 제로포인트, 즉 죽음의 자리였다. 해서, 십자가는 ‘나‘를 죽여 인류를 구제하는 자리가 되었다. 기독교는 x축에 두 손을 못 박고 y축에 두 발을 못 박고 에고를 완전히 죽이는 십자가의 종교다. 내가 있으면 신은 없다. 신이 있으면 나는 없다. 내가 없는 자리, 십자가에 나를 못 박는 자리에 설 때 비로소 신이 있다.

범부의 인생살이라고 해서 수행과 별반 다르지 않다. 거둬야 할 번뇌로 치자면 산중의 수행자보다 아이의 아버지, 아내의 남편이 더욱 모진 수행 중에 있다고 할 것이다.

 

수행자든 범부든 중심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갈 때, 몸 가진 존재가 이뤄야 할 목적지가 가까워진다. 가정의 중심은 누구인가. 가족 중 가장 많이 포기하고 희생하는 사람, 그래서 제로포인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중심이다. 그럼 나라의 중심은 누구인가. 낮추고 또 낮춰 제로포인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중심이다.

이같이 중심은 제로포인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심은 좌표평면의 모든 자리와 연결돼 있다. 그래서 중심이다. 마치 없는 듯 있는 공기처럼, 모든 자리에 스며있는 것이 중심이다. 그래야 중심이다. 없는 것처럼 있어야 참으로 중심이다. 중심은 드러나는 자리가 아니며, 으스대는 자리가 아니다. 군림하는 자리는 더욱 아니다. 낮아지는 자리, 심지어는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자리가 바로 중심이다. 무릇 중심이 되려는 사람, 대표가 되려는 사람은 무엇보다 중심에 대한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이다.

 

거듭 말하자면, 중심은 으스대는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없는 것처럼 있는 자리, 그럼에도 스스로 낮추어서 다른 모든 자리와 두루 소통하는 자리이다. “신발이 발에 꼭 맞으면 발의 존재를 잊는다. 허리띠가 허리에 꼭 맞으면 허리의 존재를 잊는다.” <장자>에 나오는 말이다. 없는 것처럼 있는 중심이 그리운 세상이다.

 

이거룡/선문대 교수/인도철학/국제신문/2019.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