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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도 고용도 없는 ‘수축사회’
  
 작성자 : 허여사
작성일 : 2018-12-25     조회 : 244  

JTBC의 주말 드라마 ‘SKY캐슬’이 화제다. 유럽의 성채를 닮은 그들만의 공간에 모여 사는 학부모들의 공통된 꿈은 자식을 최고 명문대학에 보내는 것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 한서진의 지상 목표는 딸을 서울대 의대에 보내는 것이다. 서울대 의대 출신인 시아버지와 남편의 안락하고 품위 있는 삶을 물려주기 위해서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한서진은 ‘악마와의 거래’도 서슴지 않는다. 자식의 인성이 비뚤어지고, 비행을 저질러도 눈을 감는다.  

미안한 얘기지만, 서울대 의대 합격이 안온한 삶을 보장하는 시대는 끝났다. 하버드 의대나 존스홉킨스 의대를 나와도 인공지능(AI) 의사와 경쟁하고 협력하는 시대가 됐다. 모든 의학 지식과 정보, 최신 임상 사례와 연구 결과를 섭렵한 AI 의사가 진단·처방·투약·시술에서 인간을 능가할 날이 머지않았다. 자식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한서진은 딸을 의사보다 AI나 바이오 전문가로 키우는 게 낫다.  

자신보다 나은 삶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대다수 학부모의 꿈이었다. 그 일념으로 한국의 학부모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녀 교육에 올인했다. 그 결과 가끔 개천에서 용도 나오고, 대학진학률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를 이기기 힘들다. 눈치 빠른 학부모들은 자기 정도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것으로 눈높이를 낮췄지만, 그마저도 힘든 세상이 됐다. 2016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자녀의 생활 형편이 부모 세대보다 나아질 것으로 보는 한국인은 10명 중 3명에 불과하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퓨리서치 조사에서 자녀의 삶이 자신의 삶보다 좋아질 거란 응답은 미국 33%, 영국 23%, 프랑스와 일본은 15%에 그쳤다. 대학을 나와도 번듯한 일자리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현실도 다르지 않다. ‘노란 조끼’ 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는 프랑스의 청년실업률은 25%에 달한다. 한국(10%)보다 훨씬 높다. 힘겹게 취업해도 임시직이나 파트타임이 대부분이다.  

염재호 고려대 총장은 지난달 출간한 『개척하는 지성』에서 최근 실업이 늘어나는 근본적 이유는 ‘구조화된 노동’이 ‘개인화된 노동’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고용이라는 20세기의 구조화된 노동은 급속히 줄어들고, 프로젝트 단위로 일하는 개인화된 노동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장기 채용 방식인 고용은 사라지고, 다양한 형태의 단기 계약에 의해 유연하게 일자리를 이동하는 방식이 21세기 노동시장의 ‘뉴노멀’로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공감과 협업 능력, 인성이 학벌보다 훨씬 중요해진다고 강조한다. 공부만 잘하는 ‘SKY캐슬’ 출신 ‘괴물’이 환영받긴 어렵다는 얘기다.  

‘증권계의 미래학자’로 잘 알려진 홍성국 전 대우증권 사장이 최신 저서 『수축사회』에서 제시한 전망은 더 암울하다. 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전 세계가 팽창사회에서 수축사회로 넘어가기 시작했다고 진단한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 구조의 급격한 변화 속에 생산성의 획기적 증대에 따른 공급과잉이 상시화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여기에 사상 최고 수준의 부채와 양극화가 겹치면서 더는 성장 자체가 어려운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아무리 정부가 돈을 풀고,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로 펌프질을 해도 일시적 효과에 그칠 뿐, 일자리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난망하다는 지적이다.  

올 한 해 우리 사회는 소득주도 성장을 둘러싸고 극심한 내홍을 겪었다. 저소득층의 소득 증대를 통해 소비를 진작하고, 양극화를 완화한다는 취지는 좋지만,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으로 자영업자와 중소기업들이 쓰러지고, 일자리가 사라지는 현실을 목도했다. 성장세 회복과 일자리 창출이 근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엉뚱한 데 힘을 쓰다 정책은 정책대로 실패하고, 욕은 욕대로 먹은 꼴이다.
 
정부와 기업, 개인 모두 팽창사회의 미망(迷妄)에서 깨어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정부는 준법, 투명성, 신뢰, 양보와 타협 등 사회적 자본을 확충함으로써 수축 국면에서 불가피한 사회적 갈등을 조절하고 완화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홍 전 사장은 말한다.
 
행복에 대한 개인의 인식도 바뀔 필요가 있다. 행복은 소유에 비례하고 욕망에 반비례한다는 것이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이 제시한 행복 방정식이다. 분자인 소유를 늘리는 것이 팽창사회의 행복 추구 방식이었다면 수축사회에서는 분모인 욕망을 조절해 행복을 추구하는 수밖에 없다. 변화의 싹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배명복/칼럼니스트·대기자/2018.12.18./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