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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는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작성자 : 허여사
작성일 : 2016-02-08     조회 : 591  



샌더스가 시대를 좇은 게 아니라
시대가 샌더스를 따라잡은 것
그가 대통령이 되지 못하더라도
그 소신은 힘차게 공명할 것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흥미진진하다. 연말이 돼야 본선이 치러질 텐데도 두 달여 앞 우리네 총선보다 훨씬 박진감 넘친다. 총선과 대선의 중량감이 분명 다를 터지만, 난데없는 ‘박타령’만 들리는 이 땅보다, 전혀 다른 빛깔의 소신과 정견이 만발한 태평양 건너에 더 관심이 끌린다.

미 대선의 첫 관문이었던 아이오와 코커스를 지나며 사라진 건 ‘대세론’이었다. 민주·공화 양당 모두 ‘대세 후보’들이 ‘대세’를 일컫기 민망해졌다. 민주당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불과 몇 표 차로 1위를 지켰지만 언론들로부터 “사실상 패배” 선고를 받았다.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는 여론조사에서 한참 뒤져 있던 쿠바 출신의 40대 초선 상원의원에게 1위 자리를 넘겨줘 “거품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을 샀다.

‘합리적’이란 주관적 표현이다. 내 멋대로 그런 판단을 내린 건 트럼프라는 사람이 대세가 되는 사회는 결코 합리적인 사회가 아니라는 믿음에서다. “적선을 하지 않으면 트럼프를 찍겠다!”는 협박(?) 문구를 들고 구걸하는 노숙자가 등장할 정도로 비상식적 주장을 일삼는 후보가 25% 이상의 지지를 받는 사회는 정상일 수 없다(트럼프는 아이오와에서 24%의 지지를 얻었고, 유럽의 많은 인기 높은 극우정당 후보들의 지지율도 한계가 그 정도다).

미국이 정상적인 사회란 걸 증명한(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전체적인 득표율은 그 이상을 넘기 어려우리라 믿는다) 트럼프보다 내 관심을 끈 건 버니 샌더스였다. 자본주의의 본산인 미국에서 40여 년 동안 “나 홀로 사회주의”를 외쳐온 무소속의 노정객이다. 게다가 프로필의 종교란에 버젓이 ‘유대교’라고 기입하고 있는 유대인이다(부모한테서 물려받은 신앙일 뿐 유대교리를 지키는 독실한 신자는 아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4선의 버몬트주 벌링턴 시장, 8선의 버몬트주 연방 하원의원, 재선의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9개월 전 1%에 불과하던 지지율을 50% 가까이 끌어올려 대세라는 힐러리를 위협하는 대선 후보가 될 수 있었을까. 지구상에서 사회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한 거의 유일한 나라가 미국이다. 예전 칼럼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지만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에선 가난한 사람들조차 자신들을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로 보지 않고 일시적으로 쪼들리는 백만장자로 본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설명이 진리가 아니다. 지금 미국에서 자신을 쪼들리는 백만장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상위 2~5% 정도에 드는 부자들뿐일 터다(부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조금 과장됐을지는 몰라도 샌더스 말대로 “미국에서 벌어들이는 부의 99%가 1%의 사람들한테 가는 구조”인 까닭이다. 그래서 자신은 결코 백만장자가 될 수 없다고 느끼고,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경제적 불평등에 분노한 많은 사람이 샌더스에게 열광하는 것이다. “존재하기엔 너무 큰” 월스트리트 은행들을 해체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현실성 없다고 못박은 워싱턴포스트조차 “샌더스가 시대를 따라잡은 게 아니라 시대가 그를 따라잡았다”고 쓸 정도다.

그런 주장을 하면서도 포퓰리스트의 낙인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오랜 세월 한결같고 말과 행동이 일치했던 소신 정치 덕이다. 일례로 1991년 이라크 전쟁이 결정된 직후 하원의장 외에 아무도 듣는 이 없던 한밤중의 의사당에서 꿋꿋이 전쟁의 참화를 걱정하며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연설을 계속하던 모습은 오늘의 샌더스를 만든 유튜브의 인기 동영상이다(당시 찬성과 반대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힐러리와는 사뭇 달랐다). 그런 일관된 소신을 담은 옛 기록들이 하나둘 SNS를 통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샌더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 가장 최신의 IT 기술이 가장 늙은 정치인의 무기가 되고 있는 아이러니다.

버니는 개표가 끝날 무렵 청중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정말로 급진적인(radical) 아이디어를 들을 준비가 됐습니까? 그것은 억만장자 계급뿐 아니라 노동하는 가정을 위해 작동하는 미국 경제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이를 위해 경제권력에 좌지우지되는 구태의 정치를 바꾸는 정치혁명이 우선돼야 한다고 믿는다. 힐러리와는 달리 샌더스가 기업·노조 등 이익단체들이 기부한 거액의 수퍼팩을 거부하고 ‘풀뿌리’ 개인들의 소액 후원금만 받는 이유다. 후원자 중 80%에 달하는 200달러 미만의 소액 후원자들은 지난달에만 샌더스에게 2000만 달러(약 240억원)를 몰아줬다. 코커스 다음 날 하루에만 36억원이 걷혔다.

샌더스가 사회주의자라고 하지만 유럽 기준으로 보자면 훨씬 중도에 가깝다. 상·하원 의정활동만 놓고 봐도 95% 가까운 표결에서 민주당론과 같았다. 그는 오로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일반 시민들, 특히 중산층을 대변하는 정치인일 뿐이다(그가 비행기 이코노미석 승객들 가운데 껴앉아서 보고서를 읽고 있는 장면도 SNS에서 유명한 사진이다).

그는 “위로부터 변화는 절대 오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진짜 변화는 다수의 일반 시민이 목소리를 높이고 투표에 참여하며 민주적 절차에 관여할 때 일어날 수 있다. ” 샌더스가 미국 대통령이 되진 못하더라도 미국 사회에 힘차게 공명한 그의 소신은 어떻게든 미국의 정책에 녹아들 것이다. 이런 정치인이 있는 미국이 그래서 더 부럽다.

이훈범/중앙일보/논설위원/20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