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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음이 늙은 좌파에 열광하는 이유
  
 작성자 : 허여사
작성일 : 2015-09-28     조회 : 1,385  

지구상에서 사회주의가 뿌리 내리지 못한 거의 유일한 나라가 미국이다. 빈부 격차가 세계 최고인데도 그렇다.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한 작가답게 그 이유를 설명한다. “미국에선 가난한 사람들조차 자신들을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로 보지 않고 일시적으로 쪼들리는 백만장자로 본다.” 1980년대 초 에너지 위기 때 미국 유권자들이 스웨터를 껴입은 카터 대신 에너지 절약을 비웃고 “미국은 아직 아침”이라고 외친 레이건을 선택한 이유가 설명되는 해석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민주당 역시 가운데서 한 걸음 정도만 왼쪽에 있을 뿐이다. 공공부문과 노조에 의지하는 유럽식 좌파와는 달리 시장주의 대원칙을 벗어난 적이 없다. 시장경제의 효율성이 용인하는 범위 내에서 사회개혁을 약속할 뿐이다. 클린턴 정부가 그랬고, 오바마 정부 또한 다르지 않다. 그 같은 중도진보의 묵시적 동조 아래 신자유주의가 30년씩이나 맹위를 떨쳤다.


대처한테 혼쭐이 난 이후의 영국 노동당도 마찬가지다. 사회주의의 경직성과 자본주의의 불평등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찾던 블레어의 중도좌파는 결국 우파보다도 더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길로 노동당을, 그리고 영국을 인도했다.


그런 두 나라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대반전’이 놀랍다. 사회주의 불모지 미국에서 홀로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대세인 힐러리 클린턴을 앞지르고 있다. 영국에선 시장주의에 노골적 반기를 들어온 급진좌파 제러미 코빈이 2위를 멀리 따돌리고 노동당 당수로 선출됐다.


두 사람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블레어나 오바마처럼 당의 축복 속에서 등장한 신예 스타 정치인이 아니라, 정치인생 내내 외곬을 지켜온 백발의 노정객들이라는 게 하나다. 샌더스(77)는 2011년 공화당과 민주당이 합세해 부자감세 법안을 통과시키려 할 때 8시간 반 동안 필리버스터를 한 ‘무소속 투사’였다. 코빈(66)은 30년 하원 경력 동안 당론에 500번 이상 반대표를 던진 아웃사이더였다.


그럼에도 이들이 전통좌파의 낡은 창을 휘두르지 않는다는 게 다른 하나다. “1%가 독점한 권력을 되찾아 99%의 세상을 만들자”는 이들의 구호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훨씬 커진 부의 편중을 불편하게 느끼는 이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이들이 좌파의 전통적 지지층보다 젊은 층이나 부동층의 호응을 더욱 받고 있는 이유다. 코빈은 노동당원보다, 3파운드를 내고 투표한 유권자들 덕에 당수가 될 수 있었다. 샌더스는 우리나라처럼, 아니 세계 모든 나라처럼 좌절하고 있는 젊은 층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다.


물론 이들이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다. 블레어주의자로 둘러싸인 노동당에서 코빈 당수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샌더스의 열풍이 본선투표로까지 이어질지는 장담 못할 일이다. 하지만 한두 마리 제비가 보이면 봄이 멀지 않은 것이다. 세계사적 큰 흐름으로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젊은이들과 부동층이 늙은 골수 좌파 정치인에게 열광하는 건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말만 번드르르한 ‘캐비어 좌파’에 염증을 느꼈다는 것이다. 비즈니스인사이더의 인용처럼 “보수와 별 차이도 없는 정책을 내놓고는 차악(次惡)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중도진보보다 철도와 에너지를 다시 국유화하겠다는 주장이 명료하고 진정성 있게 들린다”는 말이다.


그것은 중도진영에 빨간불이 들어왔음을 의미한다. 여태까지의 허술한 사다리로는 벌어진 양극화의 간격을 이을 수 없게 됐다는 얘기다. 코빈과 샌더스의 지지층은 자신들의 의사를 이미 행동으로 보여준 적이 있는 이들이 주축이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 말이다. 서둘러 손을 쓰지 않으면 더 과격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이들을 포용하지 못하면 중도의 미래는 없다. 진짜 중요한 것은 이거다. 우리나라도 결코 예외가 아니라는 것 말이다. 


이훈범/논설위원/중앙일보/2015.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