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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달한 드라마 속 씁쓸한 일회용 컵
  
 작성자 : 허여사
작성일 : 2018-05-12     조회 : 55  

하루의 마감은 역시 달달한 드라마. 환경운동가라고 날마다 환경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옆에 서준희라는 남자가 든든하게 있는데 뭐가 무섭겠어”라며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눈웃음을 치면 나도 흐뭇해진다. 소파에 반쯤 누워 힘을 쭉 빼면 드라마의 초장부터 까무룩 세상 달콤한 토막잠에 빠져든다. 빛의 속도로 잠드는 게 특기였는데 드라마가 계속될수록 불편해져서 그 좋아하던 소파잠이 달아나버렸다. 커피 회사가 제작비를 내는 드라마라 그런지 주로 배경은 커피숍인데 매장 안에서조차 인물들은 종이컵으로만 커피를 마신다. 첫회부터 6회까지 유일하게 유리잔을 앞에 둔 건 안 좋은 일로 만난 나이 든 남자인물 둘뿐이었다.  


며칠 전 2018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이 있었다. <미스티>의 김남주(고혜란 역)는 뉴스 앵커를 매력적으로 소화해서 TV부문 대상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미스티>에서 김남주도 동료들과 항상 일회용 종이컵으로 뭔가를 마셨다. 문재인 정부 초기에 흰 와이셔츠 차림으로 대통령과 청와대 비서진이 커피를 든 채 청와대 경내를 걷던 장면은 국민들에게 신선한 호감을 줬지만 역시 일회용 종이컵이었다.

 

사무실이 밀집한 시청역 근처 출근길과 점심시간 뒤엔 대다수 직장인들이 종이컵이나 비닐컵을 들고 다닌다. 심지어 유명 커피전문점조차 먼저 요청하지 않으면 종이컵으로 준다. 얼마전에 갔던 식품 대기업 회사에서 운영하는 커피숍엔 아예 머그잔이 없기까지 하였다. 어쩌다 우리는 매년 수백억개의 종이컵을 사용하게 되었는지 원인부터 따져봐야 할 것 같다. 

 

우선 어렵게 쌓아온 폐기물 정책들이 2008년 MB 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 후퇴를 거듭했다. 2002년부터 도입된 일회용 컵 보증금 제도는 MB 정부 출범 직후인 2008년 3월 폐지되었고, 일회용 종이컵과 도시락용기, 쇼핑백과 포장 관련 규제도 사라졌다. 그 결과 일회용 컵의 소비량은 2009년 191억개에서 2015년엔 257억개로 급증하였다. 종이컵뿐 아니라 2017년 국민 1인당 플라스틱 소비량은 세계 1위, 포장용 플라스틱 사용량은 세계 2위를 기록했다. 규제가 풀린 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과도한 소비다. 나무의 일생이 종이컵으로 마감하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20년 이상 전 세계를 다니며 휴대폰부터 칫솔까지 날마다 쓰는 물건들이 무슨 원료로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며, 유통되고, 버려진 후에는 어디로 가는지 생애를 추적해온 환경운동가가 있다. 저서 <물건 이야기(The story of stuff)>로 2008년 타임지 환경영웅으로 선정된 애니 레너드. 그에 따르면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의 모습은 단면에 불과해서 원료부터 제작, 폐기 과정까지 단계별로 숨겨진 비용을 알면 지금 같은 소비를 멈출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회용 종이컵 257억개를 만들려면 1000그루의 나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도 없고, 몰라도 나에게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을 뿐 아니라, 공정에 필요한 비용도 지불할 필요가 없이 싸고 편하니 막 쓰게 되는 거다. 말하자면 소비도 생각하며 해야 하는데 언제부터인지 우리에겐 생각이 없어진 것 같다. 아니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저서 <심리정치>에서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시민은 사라지고 소비자만 남았다고 분석하였다. 쇼핑은 토론을 전제하지 않는다. 소비자는 마음에 드는 것을 사면 된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 시민을 시민으로 만드는데, 모두 각자도생의 경쟁터로 몰리면서 사색이 결여된 소비자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역설한다. 문득 두려움이 밀려온다. 페이스북, 카톡, 인터넷, TV… 일회용 종이컵이 멋져 보이게 만든 주범이 여기 있다. 미디어와 자본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 사이에서 선택만 하면 다 이루어지는 세계에서 생각하는 시민이란 멸종위기종일 뿐이다.  

               

다행히 청년 왕구량이 81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준 덕에 우리 국민이 화끈하게 쓰레기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2016년에 발표한 첫 작품 <플라스틱 차이나>는 전 세계 쓰레기의 56%를 수입하여 그 자원을 발판으로 국가는 성장했지만, 쓰레기 더미 속에서 비참하게 살아야 했던 가족의 실상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는 중국 정부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냈고 마침내 2017년 7월 쓰레기 수입 전면 중단을 발표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중국에 쓰레기를 수출하던 우리나라도 그 때문에 큰 혼란을 겪었지만 질주하는 소비를 멈추고 잠시나마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 영화를 작년 5월 국내 최초로 소개한 곳은 서울환경영화제이다. 무려 1780개 영화 중 국제경선 대상을 받았지만 우리나라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히 오는 17일 개막하는 환경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다시 상영하기로 했다. 함께 보고 일회용 컵 하나라도 함께 줄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수준 높은 경향 독자들과 함께! 


이미경/환경재단 상임이사/2018.5.6./경향신문